첫 등교

개학전에 오리엔테이션이라는 것이 있다. 한국의 오리엔테이션에 대한 기억은 술이 대부분이어서 미국에선 어떻게 하나 기대를 가지고 갔다. 자세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쓸모있는 내용들을 알려줬던 것 같다. 집에서 학교까지는 버스나 지하철을 한번 갈아타고 거의 한시간이 걸렸다. 주로 이용한 노선은 147번 express 인데, 호수변 고속도로를 지나 다운타운으로 30분 만에 도착하는 버스였다. 굴절버스였는데, 운전기사는 주로 몸집이 있는 흑인남녀였다. 2007년 즈음엔 굴절버스들이 고장이 잦았다. 고속도로 중간에서 고장나 멈춰선 경우가 간간히 있었고, 집에 가는데 두시간이 걸리곤 했다. 시카고 동쪽으로는 미시건 호수가 있는데, 그 호수변을 따라 수 많은 콘도들과 빌딩이 있다. 호수와 맞닿아 있는 빌딩들은 값도 비싸고, 대부분 안전하다. 오프라윈프리가 살았다는 빌딩은 유일하고 고속도로에서 호수쪽으로 지어졌다. 시카고에는 유명한 건축물들이 많은데, 난 졸업하고 일년뒤까지도 잘 모르고 살았다. 학교에 가니 수 많은 중국학생들이 있었다. 60%는 중국, 30% 인도, 나머지는 일부의 백인과 한국사람들이었던 것 같다. 미국에 간건지 중국에 간건지 구분이 안됐다. 알고보니, 중국에는 일리노이공대 홍보 사무실이 있어, 사람들이 많이 온다고 한다. 그당시에 같이 온 중국인들만 하더라도 그렇게 세련되어 보이지 않았는데 최근에 오는 중국인들은 한국사람같이 옷을 입고 다녀서 구분이 쉽지 않다. 대만인들도 조금 섞여 있었는데, 한 대만인에게 나중에 사기를 당할뻔 해서 아직까지도 대만인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다. 중국인들은 한국인들을 좋아하고, 친절했다. 태국친구들도 우리에게 친절하고 착했다. 인도친구들은 말이 많은 편이었다. 워낙 아시아에서 온 친구들이 많다보니 미국인친구들의 숫자는 적어서 기이하게도 그들이 학교에서 소수민족이던 나에게 다가왔다. 동질감을 느꼈던 것일까. 한국인들은 열명정도 있었다. 대부분 석사과정으로 온 학생들이었고, 박사과정은 나 밖에 없었다. 알고보니

최악의 아파트

'좋은 동네에 안좋은 집을 사라' 부동산 투자의 격언이다. 이 격언은 투자하는 사람에게 해당되는 것이지 나 같이 세들어 사는 사람들에게 적용되지는 않는 말이었다. 처음 들어간 그 아파트에 관한 몇가지를 적어볼까 한다. (지은지 100년이 다 되어 가던...) 유학가거든 집은 좋은데 구하길 바란다.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은 소음이다. 요즘 한국에선 층간 소음이 문제가 되고 있는데, 난 옆집의 소음이 문제였다. 옆집에는 싸이코가 한명 살았는데, 한달에 한두번 밤에 잠을 자다가 갑자기 미친듯이 소리를 질렀다. 거기다가 가끔은 여자친구와 전화로 싸우는지 동네가 떠나갈 듯 소리를 지르기가 다반사였다. 문앞에 노트를 적어서 붙여도 보고, 소리를 같이 질러 보기도 했지만, 그 싸이코를 조용히 시키기엔 역부족이었다. 결국 일년 반동안 그 산발적인 소음에 시달려야 했다. 싼방에 살다보니 단열이 될리도 없었다. 두번의 겨울을 그곳에서 보냈는데, 첫해는 정말 사정없이 추웠다. 시카고의 겨울이 춥기도 하였지만, 위풍이 들어오는 그 방에서 오개월에 가까운 버텨낸 나 역시도 되돌아 생각해보면 신기하다. 창문도 틀이 잘 맞지 않아 바람이 많이 들어왔는데, 집에서 밥을 하면 수증기가 창문에 붙어 얼어버려 결국엔 얼음 때문에 창문에 바람이 들어오지 않게 되었다. 정말 이모가 준 오리털 이불이 없었다면 얼어죽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듬해엔 아파트 시설관리인에게 말해 유리창을 모조리 실리콘으로 막아 버렸다. 화재가 나면 위험했으나, 일단 추위를 피하고 싶었다. 그래도 추우면 옷장에 가서 자곤했다. 가끔 설거지를 안해놓으면 바퀴벌레들이 들끓었다. 하루는 잠을 자고 있는데, 이상한 느낌이 나 방에 불을 켰다. 사방에 바퀴벌레들이 놀고 있었다. 잠시 방을 치우고 난뒤 다시 잠이 들었다. 어쩔 수 없었다. 그 사건 이후로는 절대로 설거지를 쌓아놓지 않았다. 바퀴벌레약도 사서 사방에 깔아놓았다. 다행히 효과가 있어 바퀴벌레를 그 이후엔 자주 만나지 못했다. 오래된 집이라 물도

북한의 자본주의화가 진행되지 안을까.

오늘 일본 관리가 북한에서 장시간 토론을 하고 돌아왔다는 신문 기사가 났다. 이번 일본 정부는 경제를 살리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이번 북한 방문의 목적은 그동안의 정치적인 이슈를 일단 옆으로 치워놓고 경제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함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경제적인 가치만 따지자면 북한만한 저임금을 가진 곳이 없다. 중국도 물가가 높아가고, 말레이시아 베트남은 이제 노동자의 권리를 보호하려는 움직임이 보인다. 국제 거대 자본들이 속속 북한으로 몰려 들어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 세계 경제의 회복속도가 더딘 원인도 중국의 물가 상승이 한몫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생산기지의 물가 상승은 기업들의 수익감소로 이어질 수 밖에 없고, 비용 부담을 이기기 위해 다른 지역의 고용을 줄일 수 밖에.. 북한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자본들은 북한의 낮은 임금을 이용하고 싶은 인센티브가 충분하다. 중국에 있는 기지 몇개만 북한에서 생산해도 비용이 반 또는 삼분의 일로 줄어든다. 인프라가 없다고 걱정할 수 있지만, 북한은 작은 나라다. 도로 항만 건설하는데 오랜 기간이 걸리지 않는다. 개성공단 이후에 여기저기 더 공단을 만들고 저비용 구조를 이용하면서 북한을 경제적으로 남한에 의존하게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있는데.. 정치적인 이유로 그 기회를 일본이나 중국에 넘기고 있는 것 같아 아쉽다.

공기업 부채

지난 5년동안 한전의 부채가 60조가 늘어서 82조원이 되었다. 세배가 늘었다. 정부의 공공요금 인하 조치로 부채가 늘었다는데, 한전의 재무재표를 살펴보면 2008년부터 2011년까지 당기순손실을 다 합해도 10조가 안된다. 따라서 한전의 부채 증가가 공공요금 인하 조치 때문이란 건 말이 안된다. 기사를 조금만 뒤져보면 아는 사실이지만, 외환표시 채권 발행이 늘었고, 대부분 해외 사업에 쓰여졌다. 해외사업은 대부분 해외 에너지 사업에 쓰였는데, 해외 에너지 사업은 정치적, 지형적인 요소에 영향을 많이 받고 대부분 투자한 나라들이 정치적으로 안정된 나라가 아니기 때문에 사업의 위험성은 상당히 높다. 가시적인 성과가 채권 만기까지 나오지 않으면 채권을 재발행해서 만기를 연장하는 수 밖에 없다. 지난 5년동안은 세계적으로 이자율이 낮았기 때문에 채권 발행에 좋은 시기였다. 따라서 되도록이면 장기로 채권을 발행하는 것이 이롭기 때문에 채권 발행 시기는 적절했다. 그런데 만기가 대부분 5년에서 10년인이기 때문에 박근혜 정부 중간쯤 공기업 부채 문제는 심각해질 것 같다. 더불어 미국의 낮은 이자율이 향후 2년 이상 지속될 가능성이 낮기 때문에 전망이 안좋다. 추진하는 해외사업들이 단기간에 성공하길 비는 수 밖에없다. 아니라면 전기, 가스료 인상은 피할 수 없다. MB정권의 무리한 해외에너지 개발 사업으로 인해 물가 상승은 막을 수 없을 것 같다. 또, 진행중인 해외 사업이 실패할 경우 한전의 2년치 매출을 다 쏟아 부어야 빚을 갚을 수 있기 때문에 상당히 위험하다. 위험을 피하기 위해 한전을 해외 에너지 개발회사와 국내 전기사업 회사로 나누고 채권을 해외 에너지 개발회사가 부담하게 해야 한다. 둘다 공기업으로 두되, 추후에 해외 에너지 개발 사업이 실패할 경우 담당 회사만 문을 닫게 하면 국내 파급효과를 줄일 수 있을 것이다.

50대는 왜...

‎50대의 90%에 가까운 투표율은 무엇을 말해주는 걸까. 70년대 그들은 10대 였을 것이다. 그들이 박정희 정권에 대해 향수를 갖기엔 너무 어린 나이다. 이번 투표가 박정희에 대한 향수 때문이라고 하기 어렵다. 더구나, 그들은 80년대 20대, 군사정권을 끝낸 주역들이었으니 민주화에 대한 열정이 없는 세대들도 아니다. 따라서 분명 다른 이유가 있다. 그들이 30대가 됐을때 외환위기의 직격타를 받았고 DJ를 뽑았다. 경제 위기가 해결되자 노통을 뽑았다. 40대가 되자 등록금 자유화로 자식들 등록금 걱정과 종부세로 걱정이 앞섰고, 07년 미국경제 위기로 주식시장 곤두박질 칠 때 가장 많은 타격을 받은 세대다. 동시에 그들은 가장많은 주택을 소유하고 있는 세대다. 747과 반값 등록금, 종부세 폐지 등을 약속한 MB를 뽑았다. 이번 대선 야권의 공약인 복지 정책을 위한 증세, 가야 할 길이지만 경제의 혼란을 초래할 수 있는 재벌 개혁 등은 우리 나라 50대에게 이득이 되는 것이 없다. 그들은 그저 자신에게 유리한 선택을 했을 뿐이다. 이렇게 본다면, 이번 정부에서도 재벌 개혁과 증세 없이 약속한 복지를 해결해야 한다. 결국 국가 부채를 늘려갈 것이고, 다음세대의 짐으로 돌아올 것 같다. 안타깝지만...... 바르다고 인기있는 것은 아니다.

닉슨과 상원 포섭 작전

미국에서 세금이 면제되는 조직은 정치활동을 할 수 없는데, 문선명 교회와 조직은 정치적인 활동을 했다. 이 같은 이유로 일부 조직은 뉴욕주에서 세금 면제를 받지 못하였다. 모든것이 신의 뜻이었고, 한국은 신에 의해 선택받은 나라라고 하면서, 미군의 한국 주둔을 지지했고 UN앞에서 피켓 시위를 하기도 했다. 문선명이 제시한 정치인을 포섭하는 전략은 "죽을힘을 다해 모시겠다" 이다.  "언제든지 정치인이 원하는 것을 해주어라. 그것이 무엇이든 명령을 들어주고, 신뢰를 얻는다. 결국엔 그 정치인은 완전히 의지하게 되고, 그 다음엔 니가 원하는 대로 정치인을 조종할 수 있다. 반항할 경우 지원을 중지하고, 그를 무력하게 한다. 결국 그는 너를 따를 수 밖에 없다." 문선명은 절호의 찬스를 맞게 된다. 워터게이트로 위기를 맞은 닉슨을 옹호하는 신문 광고를 미국 전역에 올렸다. 닉슨은 1973년 11월 문선명에게 감사의 편지를 보냈고, 통일교 신자들은 그해 크리스마스 트리 점등 행사에 초대받기까지 했다. 1200명의 통일교 회원들은 그 행사를 닉슨 대통령 지지행사로 바꿔버렸다고 한다. 우리나라로 치자면 종각 타종식에서 대통령후보 지지행사를 갑자기 하는 놀라운 짓이었다. 도쿄, 영국, 독일, 이탈리 등지에서도 닉슨 지지행사를 했다. 하지만, 나중에 닉슨이 중국을 방문하려하자 반대하는 시위를 주최하기도 했다. 닉슨은 평소에 종교적인 행사에서 정치색을 드러내는 것을 매우 싫어했지만, 통일교 회원들에게는 감사의 인사를 했다. 얼마나 고마웠는지 1974년 2월 1일에 대통령 조찬 기도회에 문선명이 초대되었고, 닉슨과 담소를 나웠다. 닉슨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작전이 성공한 것일 뿐만 아니라 미국의 민주주의를 방해하는데도 성공했다. 이런 일련의  활동은 사실 미국내 영향보다 한국내의 영향력을 강화하려는 목적이 더 컸다. 1975년 8월까지 상원의원 다섯과 스태프 여섯명을 포섭하는데 성공한다. 문선명은 조직을 여러개로 나눠서 운

문선명의 재단과 기업들

문선명은 세금을 면제받고 자금을 모을 목적으로 많은 재단과 단체를 조직하였다. 그중 한국 문화 자유 재단 (The Korean Cultural and Freedom Foundation, KCFF) 은 대표적인 위장 문화 단체였던 것 같다. 이 재단은 한미간의 문화 학술 교류 단체로 등록되었으나 실제로는 미국에서 기금을 모으고, 미국 부유층과 정부 관료들에게 줄을 대기 위해 사용되었다. 이 재단의 회장이었던 백보희는 문선명과의 연관성을 부인하였으나 내부간부의 증언으로 거짓으로 밝혀졌다. 또 다른 단체는 '리틀앤젤스'였는데, 미국내 통일교와 한국 문화자유재단이 활동을 지원했는데, 후에는 한국 정부에서 '리틀앤젤스'의 세계 투어를 스폰서 했다. 어린 아이들을 자신의 영향력을 넓히는데 사용했다. 리틀앤젤스에 대해 재단 관계자의 증언은 가관이다. "리틀앤젤스와 통일교회의 창립자는 같지만, 연관성은 없다." 여러 회사들도 운영했는데, 대표적인 회사가 통일 공업, 일화 약품, 일신석재, 한국티타늄 등이다. 일본에도 회사를 가지고 있었으며, 전기전자 사업으로 사업을 확장할 계획도 가지고 있었다. 미국에도 통일Enterprise라는 인삼수입회사외에 정비회사, 여행사도 차렸다. 1977년 정부는 일화약품의 사장이었고 통일교 관련 회사의 지분을 상당히 가지고 있던 김필원을 회계조작과 세금 탈루, 명의 도용로 고발하였다. 이 사건은 박정희 정권이 문선명에게 더이상 정치에 관여하지 말라는 경고이기도 했다. 1976년 News World라는 신문사가 뉴욕에서 신문 발생을 시작하였다. 1978년 뉴욕데일리가 파업에 들어갔을 때 뉴욕커들은 문선명의 신문을 읽을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에 그치지 않고, 영화제작사도 설립하였다. 문선명은 미국의 생선시장에도 발을 들였는데, International Oceanic Enterprises 과 International Seafood Co.를 설립하고, 참치시장을 지배하려는 욕심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