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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생활 친구

유학을 나오면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게 된다. 한국에서 나오기 전에 대부분 한국 사람들은 인터넷 카페를 통해 안면을 익히고 나온다. 내경우엔 전혀 그런 정보를 파악할 시간도 없었고 그러고 싶은 생각도 없어서 학교에 있는 한국 사람을 전혀 몰랐다. 그래서 처음엔 그들과 어울리기가 어려웠고, 초반엔 그들로 부터 약간 경계심을 느꼈다. 어차피 공부하러 나온 것이었기 때문에 별로 신경은 쓰지 않았고, 차츰 서로 도움을 주고 받으며 친해졌다. 유학을 나오면 한국과 달리 좁은 한국인 사회에서 서로의 다양한 면을 노출하게 되기 때문에 좋은 사람과 문제가 있는 사람의 구분이 편하다. 마치 전쟁터에서 용기있는 사람과 없으면 더 좋을 아군을 구별하기가 쉬운 것처럼 말이다. 한국에서 정보를 공유한 유학생들은 대부분 다운타운에 집을 얻어서 살았다. 내 경우는 혼자 알아보다가 학교에서 한시간 거리에 집을 구했기 때문에 그들처럼 적응이 편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덕분에 단시간에 다양한 나라에서 온 친구들과 사귈 수 있었고, 미국 생활의 적응이 더 빨랐던 것 같기도 하다. 중국에서 온 친구들은 한국인들에 대한 큰 관심이 있었다. 가만히 있어도 다가와 먼저 말을 걸고 친해지려 해주었다. 어딜가나 중국인들이 다수이기 때문에, 그들은 다른 나라 사람들과 친해지려 하는 걸 수도 있다. 대만인들은 반면에 한국인들에 대해 좋은 인상이 없는 듯 했다. 대만인에게 아파트 때문에 사기를 당할 뻔 했는데, 자존심이 있는 것인지 사과조차 하지 않았다. 일본인들은 친해지기가 쉽다. 과거 역사의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개인적으로 그들과 같이 지내면 편하고 특별히 나쁜일은 없는 듯 하다. 인도인들의 영어는 처음엔 알아듣기가 힘들다. 인도인 나름대로의 억양이 있는데, 정말 처음엔 알아듣기가 힘들다. 영어를 하는 건지 딴 나라 말을 하는 건지.. 인도인들은 대체로 활기차고 자기의견을 표출하는데 주저함이 없다. 그래서 겉으로 보면 뭔가 잘 아는 것 같은데, 알고보면 그냥 평범한 경우도 많다.

첫 등교

개학전에 오리엔테이션이라는 것이 있다. 한국의 오리엔테이션에 대한 기억은 술이 대부분이어서 미국에선 어떻게 하나 기대를 가지고 갔다. 자세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쓸모있는 내용들을 알려줬던 것 같다. 집에서 학교까지는 버스나 지하철을 한번 갈아타고 거의 한시간이 걸렸다. 주로 이용한 노선은 147번 express 인데, 호수변 고속도로를 지나 다운타운으로 30분 만에 도착하는 버스였다. 굴절버스였는데, 운전기사는 주로 몸집이 있는 흑인남녀였다. 2007년 즈음엔 굴절버스들이 고장이 잦았다. 고속도로 중간에서 고장나 멈춰선 경우가 간간히 있었고, 집에 가는데 두시간이 걸리곤 했다. 시카고 동쪽으로는 미시건 호수가 있는데, 그 호수변을 따라 수 많은 콘도들과 빌딩이 있다. 호수와 맞닿아 있는 빌딩들은 값도 비싸고, 대부분 안전하다. 오프라윈프리가 살았다는 빌딩은 유일하고 고속도로에서 호수쪽으로 지어졌다. 시카고에는 유명한 건축물들이 많은데, 난 졸업하고 일년뒤까지도 잘 모르고 살았다. 학교에 가니 수 많은 중국학생들이 있었다. 60%는 중국, 30% 인도, 나머지는 일부의 백인과 한국사람들이었던 것 같다. 미국에 간건지 중국에 간건지 구분이 안됐다. 알고보니, 중국에는 일리노이공대 홍보 사무실이 있어, 사람들이 많이 온다고 한다. 그당시에 같이 온 중국인들만 하더라도 그렇게 세련되어 보이지 않았는데 최근에 오는 중국인들은 한국사람같이 옷을 입고 다녀서 구분이 쉽지 않다. 대만인들도 조금 섞여 있었는데, 한 대만인에게 나중에 사기를 당할뻔 해서 아직까지도 대만인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다. 중국인들은 한국인들을 좋아하고, 친절했다. 태국친구들도 우리에게 친절하고 착했다. 인도친구들은 말이 많은 편이었다. 워낙 아시아에서 온 친구들이 많다보니 미국인친구들의 숫자는 적어서 기이하게도 그들이 학교에서 소수민족이던 나에게 다가왔다. 동질감을 느꼈던 것일까. 한국인들은 열명정도 있었다. 대부분 석사과정으로 온 학생들이었고, 박사과정은 나 밖에 없었다. 알고보니

최악의 아파트

'좋은 동네에 안좋은 집을 사라' 부동산 투자의 격언이다. 이 격언은 투자하는 사람에게 해당되는 것이지 나 같이 세들어 사는 사람들에게 적용되지는 않는 말이었다. 처음 들어간 그 아파트에 관한 몇가지를 적어볼까 한다. (지은지 100년이 다 되어 가던...) 유학가거든 집은 좋은데 구하길 바란다.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은 소음이다. 요즘 한국에선 층간 소음이 문제가 되고 있는데, 난 옆집의 소음이 문제였다. 옆집에는 싸이코가 한명 살았는데, 한달에 한두번 밤에 잠을 자다가 갑자기 미친듯이 소리를 질렀다. 거기다가 가끔은 여자친구와 전화로 싸우는지 동네가 떠나갈 듯 소리를 지르기가 다반사였다. 문앞에 노트를 적어서 붙여도 보고, 소리를 같이 질러 보기도 했지만, 그 싸이코를 조용히 시키기엔 역부족이었다. 결국 일년 반동안 그 산발적인 소음에 시달려야 했다. 싼방에 살다보니 단열이 될리도 없었다. 두번의 겨울을 그곳에서 보냈는데, 첫해는 정말 사정없이 추웠다. 시카고의 겨울이 춥기도 하였지만, 위풍이 들어오는 그 방에서 오개월에 가까운 버텨낸 나 역시도 되돌아 생각해보면 신기하다. 창문도 틀이 잘 맞지 않아 바람이 많이 들어왔는데, 집에서 밥을 하면 수증기가 창문에 붙어 얼어버려 결국엔 얼음 때문에 창문에 바람이 들어오지 않게 되었다. 정말 이모가 준 오리털 이불이 없었다면 얼어죽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듬해엔 아파트 시설관리인에게 말해 유리창을 모조리 실리콘으로 막아 버렸다. 화재가 나면 위험했으나, 일단 추위를 피하고 싶었다. 그래도 추우면 옷장에 가서 자곤했다. 가끔 설거지를 안해놓으면 바퀴벌레들이 들끓었다. 하루는 잠을 자고 있는데, 이상한 느낌이 나 방에 불을 켰다. 사방에 바퀴벌레들이 놀고 있었다. 잠시 방을 치우고 난뒤 다시 잠이 들었다. 어쩔 수 없었다. 그 사건 이후로는 절대로 설거지를 쌓아놓지 않았다. 바퀴벌레약도 사서 사방에 깔아놓았다. 다행히 효과가 있어 바퀴벌레를 그 이후엔 자주 만나지 못했다. 오래된 집이라 물도

액땜

2007년 4월 즈음 합격 통지를 받고 시카고에 도착할 때까지 난 시카고란 도시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물론 내가 가기로 한 학교도 아는 바가 전무했다. 그저 유학을 나가면 새로운 유토피아가 펼쳐질 것으로 기대했을 뿐이다. 미드(미국드라마)를 보면서 머리속에 든 선입견과 현실은 차이가 많았다. 미국 친구들과 유대를 쌓으면서 파티도 하고 회사에도 취직하는 아름다운 시나리오를 머리속에 그리면서 그 해 8월 미국땅을 밟았다. 시차적응도 할겸 멤피스에 있는 이모집에 먼저 가게 되었다. 이모집은 정확히 말하면 멤피스 근교에 있는 Collierville이라는 잘사는 동네에 있는데, 골프장 안에 있는 동네라 풍경이 너무 아름다웠다. 집 앞에는 조그마한 호수가 있어서 오리들이 항상 노닐고 있었다. 아름다운 미국 생활은 여기서의 일주일 이후 잠시(?) 미루게 된다. 여기서 일주일 가량 시차 적응을 하고 고맙게도 이모, 이모부께서 같이 시카고에 가 주셨다. 무려 9시간이나 걸리는 거리인데, 같이 가주셔서 너무 감사했다. 가도가도 끝이 없는 미국 땅.. 그 위에 끝없이 펼쳐진 농작물들.. 그리고 주요 도시를 연결하는 잘 갖춰진 고속도로.. 그 스케일에 놀라고 반하게 된다. 기회가 되면 꼭 미국 자동차 여행을 권하고 싶다. 한국에서 미리 알아본 아파트에 가서 계약서에 싸인을 하고 방을 보러 들어갔다. 인터넷으로 본 사진과는 영 딴판이었다. 한달에 600불짜리 아파트였는데, 넓이는 한국에 15평 아파트 정도 되는 수준이지만, 실내 내용물은 정말 눈물 날 지경이었다. 입주하기 전에 보통 카펫 청소를 하거나 새로 깔아주는데, 아직 깔지 않아서 바닥이 드러나 보였는데 계약을 취소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게 들 정도였다. 그 당시 시카고 시내에 Studio 아파트가 천불정도 했으니, 600불을 내고 살면서 큰 기대를 하는 것 자체가 무리이긴 했다. 그날 계약을 하고 Niles에 있는 '장충동' 이라는 식당에 가서 밥을 먹고 호텔에 들어가서 있는데, 인터넷을 뒤

유학 준비.

유학을 준비하던 시절 나는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지금은 한국에서 철수한 Allianz Global Investor 라는 외국계 투자 회사. 그 당시 아침 6시 반까지 출근하고 저녁엔 빨라야 7시 반정도에 퇴근했으니, 집에서는 그야말로 잠만 자던 시절이었다. 한번은 집에서 가져온 쌀을 너무 오래 먹지 않고 나두었더니 쌀벌레들이 너무 많아져서 쌀을 모두 버리기도 했다. 그 없던 시간을 쪼개고, 주말을 이용해 공부를 하였지만, 유학을 가기 위한 영어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얻기란 쉽지 않았다. 실제로 나는 유학을 세번의 도전만에 가게 되었다. 한마디로 유학 삼수생이었다. 그마저도 대학교 시절 단짝이었던 종민이가 내 자취방에 같이 살게되지 않았다면 유학을 가지 못했으리라 짐작된다. 종민이는 굉장히 차분하고 끈기가 있고 부인을 사랑하는 친구다. 이 친구 역시 유학을 한두해 낙방하다가 그 당시 여자친구(훗날 부인)와 헤어질 뻔한 상황이 되자, 정신을 차리고 서울에 올라와 유학공부를 시작하였다. 서울에 올라오자 마자 자취방에 있는 라면을 한개 끓여먹고 바로 서울대에서 있는 스터디 그룹에 갈 정도로 상황이 급박했다. 그때가 2006년 봄이었다. 계속 학교에만 있었던 친구라 방값 중 십만원을 나눠내라고 하다가 나중엔 그마저도 받지 않고 그냥 같이 있게 되었다. 그 덕분에 정보를 많이 얻게되고 유학준비도 잘하게 되었으니 서로 도움이 되지 않았나 싶다. 종민이는 계속 스탠포드에 유학을 가게 되었고, 그의 결혼식에서 그 장인어른은 만세를 불렀다. GRE를 봤는데, 경기대학교에서 두번을 보고 마지막은 일본에 가서 시험을 봤다. 경기대에서 보는 시험은 PBT였는데,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분위기도 삭막하고, 학교 근처에서 항상 공사를 했기 때문에, 환경이 별로 좋지 않았다. 점수가 잘 나왔다면 이런 나쁜 인상으로 기억되진 않았을지 모르겠다. 두번 PBT로 본 시험 결과는 영어가 500점대였던 것 같다. 그 점수를 가지고 좋은 학교만 지원했으니 낙방하는 것은 당연지사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