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 준비.

유학을 준비하던 시절 나는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지금은 한국에서 철수한 Allianz Global Investor 라는 외국계 투자 회사. 그 당시 아침 6시 반까지 출근하고 저녁엔 빨라야 7시 반정도에 퇴근했으니, 집에서는 그야말로 잠만 자던 시절이었다. 한번은 집에서 가져온 쌀을 너무 오래 먹지 않고 나두었더니 쌀벌레들이 너무 많아져서 쌀을 모두 버리기도 했다.

그 없던 시간을 쪼개고, 주말을 이용해 공부를 하였지만, 유학을 가기 위한 영어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얻기란 쉽지 않았다. 실제로 나는 유학을 세번의 도전만에 가게 되었다. 한마디로 유학 삼수생이었다. 그마저도 대학교 시절 단짝이었던 종민이가 내 자취방에 같이 살게되지 않았다면 유학을 가지 못했으리라 짐작된다.

종민이는 굉장히 차분하고 끈기가 있고 부인을 사랑하는 친구다. 이 친구 역시 유학을 한두해 낙방하다가 그 당시 여자친구(훗날 부인)와 헤어질 뻔한 상황이 되자, 정신을 차리고 서울에 올라와 유학공부를 시작하였다. 서울에 올라오자 마자 자취방에 있는 라면을 한개 끓여먹고 바로 서울대에서 있는 스터디 그룹에 갈 정도로 상황이 급박했다. 그때가 2006년 봄이었다.

계속 학교에만 있었던 친구라 방값 중 십만원을 나눠내라고 하다가 나중엔 그마저도 받지 않고 그냥 같이 있게 되었다. 그 덕분에 정보를 많이 얻게되고 유학준비도 잘하게 되었으니 서로 도움이 되지 않았나 싶다. 종민이는 계속 스탠포드에 유학을 가게 되었고, 그의 결혼식에서 그 장인어른은 만세를 불렀다.

GRE를 봤는데, 경기대학교에서 두번을 보고 마지막은 일본에 가서 시험을 봤다. 경기대에서 보는 시험은 PBT였는데,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분위기도 삭막하고, 학교 근처에서 항상 공사를 했기 때문에, 환경이 별로 좋지 않았다. 점수가 잘 나왔다면 이런 나쁜 인상으로 기억되진 않았을지 모르겠다.

두번 PBT로 본 시험 결과는 영어가 500점대였던 것 같다. 그 점수를 가지고 좋은 학교만 지원했으니 낙방하는 것은 당연지사였는데, 그 당시에는 왜 희망을 가지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종민이가 온 후에 겨우 같이 공부를 시작하면서 단어도 제대로 외우고 연습문제도 풀어보면서 최신 경향을 익힐 수 있었다.

종민이가 온 이후로 서너달동안은 거의 매주 같이 서울대 도서관에 가서 유학 공부를 했다. 시간을 아끼기 위해 서울대 학생 식당 밥을 먹으면서 공부했는데, 금방 배가 고파왔다. 회사에서도 컴퓨터에 단어장 프로그램을 띄워놓고 수시로 단어를 외우곤 했다. 거의 다섯달 정도는 유흥이란 단어는 생활속에 찾아보기 힘들었던 것 같다.

2008년 8월 말 일본에 가서 시험을 보고 왔는데 우리나라와 너무나 비슷한 모습을 보고 너무 신기했다. 어쨋건, 시험장 가까이 있는 '어방' 호텔에서 하루를 자고 시험을 봤다. 그 호텔 로비에는 한국 사람들이 많았다. 운이 좋으면 오전에 일찍 시험을 친 사람으로부터 시험 내용에 대해 들을 수 있어서 시험에 많이 도움이 된다. 실제로 첫번 시험에 영어 700점대를 맞은 사람도 있었다.

간김에 일본 여행을 해도 되었겠지만, 그냥 다음날 귀국했다. 그땐 별로 그런 기분이 아니었던 것 같다. 600점대 중후반을 받았는데, 계속 공부해서 점수를 좀 더 받았으면 어뗏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냥 그땐 그만하고 싶었던 것 같다. 유학준비를 너무 오래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다.

높지 않은 점수와 교수님들의 추천서를 가지고 꾀나 많은 학교에 지원서를 보냈다. 우편료도 한건에 오만원 정도로 부담스러웠다. 외식을 많이 하지 않아도 항상 가난할 수 밖에 없었다. 계속 떨어지다가, 마지막으로 지원한 곳에서 연락이 왔고, 난 유학을 가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내 고생길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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